“시니컬 하지만 희미한 사랑의 그림자’ 영화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리다>홍상수,2015

1. 홍상수의 영화가 점점 순진, 아니 천진난만해지고 있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의 ‘분명히 보이는 얕은 수’가 그리 밉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 그는 어른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위선적인 말과 행동을 경멸한다.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남자 배우들의 행동은 그의 영화에서 무참히 조롱의 대상이 된다. 홍상수 영화 전작을 보면 이 감독이 혹시 남성혐오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전형적인 (주로 예술계 출신 기혼자) 남성들의 본능적인 ‘작업의 시간’이 그의 주요 영화 소재이자 무려 17년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다. 2. 먼저 예쁘고 매력적인 여성에게 말을 거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어 여성에게 술자리를 제안하고 (곧 술자리로 점프컷 이동하기도 한다) 나름대로 술병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상투적인 문구는 무엇일까라고 연구하는 사람처럼 칭찬한다. 대충 훈계조 인생상담 및 잠언투 개똥철학을 읊거나 반복하며 ‘넌 참 예쁘다, 사랑한다’는 말의 기승전 귀결과 하룻밤 섹스 시도의 참담한 실패로 스스로의 허세와 속물다움을 품고 자멸하는 코미디다. 어떻게 이처럼 한결같이 술자리에서 이뤄지는 다큐멘터리적 롱테이크 기법 하나만으로 17편의 장편을 매년 하나씩 생산할 수 있는지 경이롭기도 하다. 3. 대신 그는 다르게 반복한다. 남녀의 시점을 달리해 반복하거나, 여자를 두고 두세 사람이 경합을 벌이면서 각자의 시점에서 반복하거나, 시간이 뒤죽박죽 섞여 반복하거나, 여자에 대한 근거 없는 환상으로 꿈과 현실이 겹치거나, <지금은 옳고 그때는 다르다>에서는 같은 상황의 두 번 반복이다. 둘째 여자(김민희)는 좀 더 외롭고 남자(정재영)는 좀 더 솔직해졌을 뿐이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줄기는 반복되는 순환과 미세한 차이의 충돌로 오는 순간의 작은 변화다. 이것은 우주의 탄생 기원이기도 하다.) 4. 홍상수의 대부분 필모그래피의 공통점은 그가 연애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그 연애에 대한 욕망이 결국 헛된 시도로 끝날 것임을 안다. 하찮은 것에 대한 인간의 집착, 지겹도록 똑같고 필연적으로 실패하지만 다시 욕망을 품을 수밖에 없는 삶의 지극히 우연성과 의미 없는 것을 그는 사랑한다. 연애라는 소우주를 관통하며 홍상수는 삶의 반복되는 일상 회귀, 억겁의 시간을 경유해 여전히 돌고 있으며 벗어날 수 없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보여준다. 5. 그의 애정관은 쇼펜하우어의 여성혐오보다 차갑고 선불교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이다’ 세계관보다 뛰어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허무하다. 그 차가움이 그대로 전해져 와서 우리는 계속 낄낄거리면서도 그 속 거울처럼 비친 내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요즘 타국에서 스님(도올 김용옥)의 불교식 선문답과 비슷하다.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안느(이사벨 유페르) 질문에 스님은 “정말 무서운 일이 있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당신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무서워지는 것이다”고 대답한다. 홍상수의 인물들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이들의 사랑은 예쁘고 어린 여성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순간의 성적 끌림이다. 선문답 같지만 믿지 않으니 정말 사랑이 없어 보인다.6. 그런데 뭔가 달라졌다. 이제 그는 연애의 윤리를 묻는다. 그때와 지금, ‘옳다, 다르다’의 윤리적 이항 대립이 홍상수 영화 제목으로 쓰이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일 것이다. (기존 홍상수 영화는 윤리적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윤리를 묻는 이 영화는 이제 두 평행이론 같은 시간을 건넌다. 하나는 위선적이고 목적인가?우선적인 관계를 위해 자신도 모르게 립서비스를 하는 인간관계가 있고, 두 번째는 그다지 위선적이지 않지만 보다 솔직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얻어지는 과거 홍상수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순진하고 로맨틱한 판타지 어딘가 온기를 얻은 ‘어렴풋한 사랑의 그림자’에 도달한다. 어쩌면 순간의 그 감정만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추위에 떨며 김민희를 기다렸다가 헛수고를 하고 돌아온 정재영의 모습이 엔딩 장면이었다면 아마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다음날 정재영의 영화를 보고 가는 김민희의 뒷모습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여전히 냉소적이지만 깊어지고 있는 것일까. 눈앞의 <자유의 언덕>에서 그는 점점 따뜻해지고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옛 글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2015)

1. 홍·상수의 영화가 더 순진, 아니 천진 난만하게 되고 있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의 “분명히 보이는 얄팍한 수”가 그리 밉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는 어른의 세계에서 밖에 통용되지 않는 위선적인 말과 행동을 경멸한다. “잘 모르는 주제에 ” 아는 체하는 남자 배우들의 행동은 그의 영화로 무자비하게 조롱의 대상이 된다. 홍·상수 영화의 전편을 보면 이 감독이 혹시 남자 혐오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전형적인(주로 예술계 출신의 기혼자)남성들의 본능적인 “작업 시간”이 그의 주요 영화 소재로 뭐라고 17년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다. 2. 우선 예쁘고 매력적인 여성에게 말을 거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어”여성에게 회식을 제안하고(바로 술자리에 점프 컷 이동하는 것도 있다)나름에 술병이 불어나기 시작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규칙 말은 무엇일까”라고 연구하는 사람처럼 칭찬. 대략적으로 훈계 조의 인생 상담 및 잠재 말 사투의 개똥 철학을 읽거나 반복하고”당신은 정말 예쁘다, 사랑하는 “이란 말의기 승이 귀결과 하룻밤의 섹스 시도의 참담한 실패로 자신의 허세라고 속물스러움을 안고 자멸할 코미디. 왜 이처럼 하나같이 술자리에서 열리는 다큐멘터리적인 롱 테이크 기법 하나만으로도 17편의 장편을 매년 하나씩 생산할 수 있는지 경이적이기도 하다. 3. 대신 그는 다른 방식으로 반복한다. 남녀의 관점을 달리하여 반복하거나 여자를 놓고 두 세명이 경합을 하면서 각자의 시점에서 반복하거나 시간이 뒤죽박죽 섞여서 반복하거나 여자에 대한 터무니 없는 환상 꿈과 현실이 겹치거나,<지금은 맞고, 그때는 다른>에서는 같은 상황의 2회 반복이다. 2번째 여자(돈 민희)은 좀 더 적적해서 남자(정·재용)은 좀 더 솔직하게 드러냈을 뿐이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줄기는 반복되는 순환과 미세한 차이의 충돌에서 오는 순간의 작은 변화다. 이는 우주의 탄생 기원이기도 하다.)4. 홍·상수의 대부분의 필모그래피의 공통점은 그가 연애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달려가그 연애에 대한 욕망이 결국은 헛된 시도로 끝나는 것을 알고 있다. 하찮은 것에 대한 인간의 집착, 지겹게 똑같은 필연적으로 실패했다가 다시 욕망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천만의 우연성과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는 사랑한다. 연애라고 하는 소우주를 관통하고 폰·상수는 인생의 반복되는 일상의 회귀, 귀찮은 시간을 경유하여 여전히 돌고 있어 나갈 수 없다”윤회의 바퀴”을 보인다. 5. 그의 애정관은 쇼쯔후에은하우아ー의 여성 혐오보다 차가운, 선불교의 “모든 것은 낭비에서 낭비이다”의 세계관보다 뛰어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공허하다. 그 냉기가 그대로 전해지고, 우리는 계속 낄낄 웃으면서도 그 안의 거울처럼 비친 내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 일깨우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최근 『 타국에서 』의 스님(토오루·김·영옥)불교식 선문답에 비슷하다. 내가 두려워할 이유가 뭔가를 가르치라는 안누(이사벨·유뻬루)질문에 스님은 “정말 끔찍한 일이 있고 무서운 것이 아니라, 당신이 두려워하니까 무서워진다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홍·상수의 인물들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이란” 깨끗하고 어린 여성에 대한 억제 못하는 순간의 성적 유치”이다. 선문답 같지만 안 믿으니까 정말로 사랑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6. 그런데 뭔가 달라졌다. 이제 그는 연애의 윤리를 묻는다. 그때와 지금” 옳다”의 윤리적인 이항 대립이 홍·상수 영화의 제목으로 쓰이기는 정말 드문 것이다. (기존의 폰·상수 영화는 윤리적 질문을 하지 않는다)윤리를 묻는 이 영화는 이제 두개의 평행 이론 같은 시간을 건너다. 하나는 이중적 목적?우선적인 관계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덕담을 하는 인간 관계가 있고 2번째는 별로 위선적이지는 않지만 좀 더 솔직하게 되려고 노력하고 얻은, 과거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보지 못한 순진하고 낭만적인 판타지의 어딘가, 온기를 얻은 “희미한 사랑의 그림자”에 도달한다. 어쩌면 순간의 그 감정만 우리가 할 유일한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추위에 떨면서 김·미니를 기다리고 낭비하고 돌아온 전·재용의 모습이 엔딩 장면이었다면 아마도 전작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겠지만 다음날 전·재용의 영화를 보는 김·미니의 뒷모습이 묘한 감흥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여전히 냉소적이지만, 깊어지고 있을까. 눈앞의<자유의 언덕>에서 그는 점점 따뜻해졌다.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옛 글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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