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 이씨 시조는 베트남 최초의 왕조(Ly. 이씨)의 마지막 왕자(한국명 이씨)…769년 만에 찾은 역사

화산 이씨 시조는 베트남 최초의 왕조(Ly. 이씨)의 마지막 왕자(한국명 이씨)…769년 만에 찾은 역사

나는 베트남에 꽤 자주 드나드는 편이야. 아시아권에서는 중국 다음으로 많이 드나들었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 문화의 단면에도 자연스럽게 상당한 거리를 두게 됐다. 특히 언어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분이다.

이곳 블로그에도 여러 번 썼지만 베트남은 언어문화에 관한 한 불행한 약소국의 표본이다. 오랜 중국의 통치로 당시 중국인들이 부르던 달의 나라라는 이름이 지금의 국명 베트남을 만들어냈을 정도다. [한자어의 ᅳᆷ の 남쪽 발음이 습식난인데 베트남은 그것을 영어로 바꾸어 표기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그러한 중국어의 발음이 베트남에서 토착화되면서 일부 변형이 있었지만(중국어는 4이지만 베트남어는 더 어렵다), 그것을 표기하는 문자가 없었다. 그것을 처리해 준 것이 프랑스 신부였다. 그래서 베트남어는 베트남화된 중국어를 서양식 표음문자로 바꾸어 쓰는 이중의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다. 즉 발음은 중국어 지방어로 표기는 서양 문자를 빌려 새로 만든 것으로 적어졌다.

그러다 생긴 불행이 있다. 고급(문화적) 베트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 뿌리를 둔 것이지만 한자가 없어지면서 베트남인들은 그것이 한자어임을 알 수 없게 됐다. 일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찌터널의 구찌도 본말은 ‘친척’이다. (실제로 구찌터널 관광단지 입구에 크게 세운 정식 명칭 간판에는 이 한자 표기가 그대로 들어 있다: ‘친척수민문화’) 이외에도 호찌민 시내 주요 간선도로명(‘태일로’)은 중국어대로에서 왔고 유명 해변 휴양지인 롱하이와 하노이의 후안감 등은 중국어 발음 그대로다. 그럼에도 한자가 사라진 베트남에서는 그것을 읽거나 아는 사람은 극소수의 중국어학과 학생/교수 정도다.

사진 : 입터널 관광단지의 정식 명칭은 고지 소수민족 문화마을이다.

이야기가 길었다. 베트남 왕조사는 길고 복잡하다. 많은 왕조가 명멸했다. 그때마다 유력한 성씨가 등장했다. 지금 현재 베트남 성씨 중 가장 번성한 사람들의 성씨도 사실은 이 유력 성씨의 후손인데, 그 뿌리를 보면 모두 한자어이다. 일례로 베트남에서 우리 김씨처럼 가장 많은 성이 ‘응우옌’인데, 이는 ‘응우옌’의 베트남식 발음으로 지금은 ‘응우옌’으로만 남았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다수의 성씨인 ‘예/전/황’ 등은 각각 ‘예///’의 베트남식 표기이다. [해당 상세판은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 http://blog.] naver.com/jonychoi/221018297775 ] 의미가 분리된 상태에서의 문자 암기는 고급 이해력+확장력으로 지장이 많다! 아래 기사는 국립국어원의… blog.naver.com ******************************************************************** 전설이 아닌 실화다. (최근에는 자손의 DNA 검사만으로도 진위가 쉽게 판별되는) 이후 화산 이씨와 베트남 정부와의 관계는 기사 속에서 상세히 다뤄지고 있다.

내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런 외국인 귀화가 사실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실 한국은 100% 순수한 단일민족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그 점을 얘기한 게 20여 년 전이었는데 그 증좌는 가득 차 있다.

좋은 예로 향가와 춤으로 남은 처용 이야기가 있다. 향가처용가는 남편이 밤늦게까지 신나게 놀다가 들어가 보니 아내가 왜 남자와 얽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술기운에 너그러워졌는지 남자가 그걸 보고 네 다리 중 두 개는 내 것이었는데 이제 다른 남자가 빼앗아 갔으니 이걸 어쩌나 하고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끝난다. 그래서 그 노래가 굉장히 유명해져서 춤에까지 남게 됐는데 그게 처용무다. 그 춤출 때 쓰는 가면이 처용가면인데 그거 보니까 딱 아랍인이다. 무엇보다 당시 신라 상류층의 성문화는 난잡하다고 할 정도로 자유로웠다.(대표적인 것이 유명 드라마 ‘선덕여왕’에 등장한 미실. 그녀는 권력 획득과 유지를 위해서라면 아버지와 자식 할 것 없이 남자들을 마음대로 골라 취해 있었다. (서양속담, 자기관리속담)

어쨌든 그런 신라시대에 색다른 외제 수입품인 아랍 남자들은 꽤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역시 힘센 여성들의 영향력이 작용한 탓인가?) 당당하게 신라사회에 입성하였으며, 그 흔적은 신라왕 무덤 형식 중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원성왕릉에서 문인상/무인상의 일부로 당당히 남아 있다.

사진: 처용가면에 남아있는 아랍인의 흔적

사진: 원성왕릉의 무인상으로 남아 있는 아랍인의 모습처럼 한반도로 외지인의 유입과 혼혈의 역사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야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부인 허환옥 왕후가 인도인(아유타국)이었던 것 또한 그런 잦은 교류의 대표격이다.

위의 베트남 왕자의 이야기도 그 일부다. 그런 외국인 혼혈의 역사는 우리 역사책에서도 뚜렷하다. 효종 대인 1653년 서귀포로 표류해온 하멜보다 27년 먼저, 1626년 온 박영이 그 예이다. 본명이 양양수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인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갔고, 후에 귀화하여 밀양 박씨의 성을 하사받고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맡았으며, 하멜이 서울로 압송되어 오자 통역과 감독관 역할도 하였다. 그 사이 조선 여성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지냈으나 결국 조선인으로서 조선 땅에서 여생을 마쳤다. 다시 말해 외국인 벨테브레는 밀양 박씨 중 한 파벌의 중시조로 한국의 혼혈문화에 크게 기여했다. 저 위의 베트남 왕자가 화산 이씨를 창설한 것처럼.

이야기가 길었다. 세상은 좁다. 지금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그랬다. 사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되나? 우리 민족도 사실 100% 순수한 단일민족은 아니었다. 최근 늘어나는 다문화 가정에 대해 좀 더 크고 화기애애하고 멋있게 우리 사회를 개방해야 하는 이유다.

모든 인종의 전시장인 미국이 용광로 아메리카 인종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통합되면서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혼혈 역사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혼혈은 인종 간의 가장 확실한 본딩(bonding. 일체화 결합)이다. 미국의 유명인사 중에는 외할머니가 인디언인 사람도 적지 않고 백인 여성 흑인 남편도 지금은 별로 눈길을 끌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터키나 우주백의 백인 여성들이 한국인 남편의 짝꿍으로 나타나도 예사롭지 않게…

옹초 최정희(23Jul.) ~~~~~~~~~~~~~~~~~~~~~~~~~~~~~~~~~~~~~~~~~~~~~~~~~~~~~~~~~~~~~~~~~~~~~~~~~~~~~~~~~~~~~~~~~~~~~~~~~~~~~~~~~~~~~~~~~~~~~~~~~~~~~~~~~~~~~~~~~~

편집자가 자체적으로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차오)를 전달합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해드립니다.

14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 인근에 위치한 바쿠닌 성 톈둥 사원 내 정자 앞을 한 시민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고 있다. 천동사원은 베트남 리 왕조 역대 왕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박닌=정재호 특파원=이 왕조의 8대 왕 혜종이 별세했다. 이씨 가문의 왕족과 종친들은 빨리 궁궐로 들어가야 한다.1226년 베트남 북부 권력을 모두 장악한 정 씨 일족의 명령은 추상적이었다. 1년 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왕권까지 첸 씨 일족에게 넘긴 전 대리 왕족은 입후보 명령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다만 화가 날까봐 걱정 없는 옷을 입고 궁궐로 향할 뿐이었다.

장례식이 열린다는 궁궐은 조용했다. 뭔가 수상한 기색이 가득했지만 서글픈 정씨 일가 병사들의 시선 속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학살 중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1009년 처음으로 베트남 땅에 통일왕조를 세운 이 왕족은 그렇게 끔찍하게 살육당했다.

비슷한 시간 지금의 하이퐁시가 위치한 베트남 북부의 한 선착장에는 6대 왕 영종의 일곱째 아들 리롱투엉 왕자가 쓸쓸히 서 있었다. “빨리 도망쳐라. 궁에 오면 안 된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던 그에게 날아온 출처를 알 수 없는 편지가 그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했다.거친 바다에 식송과 몸을 실은 리롱투엉 왕자의 여정은 험난했다. 일단 살기 위해 출발했을 뿐 목적지도 없던 여정은 풍랑에 수없이 방향을 잃었다.

남송과 금까지 떠돌던 이들은 만신창이의 몸으로 지금의 황해도 옹진군 화산포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리롱투엉 왕자는 이영상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베트남 초왕조의 마지막 후손이 시조인 한국의 화산 이씨가 태동한 순간이다.

769년 만의 귀환 베트남 화산 이씨 왕족 대우

1995년 베트남을 처음 방문한 화산 이씨 26대손 이창근 현 베트남 관광대사(오른쪽)가 베트남 공산당 간부들과 천동사원에서 찍은 기념사진. 이 사진은 천동역사박물관 안에 전시돼 있다. 박닌=정재호 특파원

우리에게 생소한 베트남 왕조의 권력 쟁탈전은 수백 년 동안 두 나라에서 잊혀졌다. 약소국이었던 한국과 베트남은 각기 다른 식민시대와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어야 했고 전쟁 이후에는 상반된 정치체제로 대립하며 살았다. 양국 모두 리롱투엉 왕자든 화산 이씨든 숨은 역사의 의미를 기릴 여력이 없던 시절이었다.

변화의 바람은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하면서 일어났다. 1995년 베트남 정부가 먼저 화산 이씨의 존재를 확인하고 종친회 주요 인사를 현지로 초청했다. 당시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공항까지 마중 나가는 등 화산 리 씨를 극진히 대접했다. 리롱투엉 왕자가 고국을 외면한 지 무려 769년 화산 이씨는 그렇게 자신들의 핏줄이 시작된 땅으로 다시 돌아왔다.

베트남 정부의 화산 파종은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베트남은 화산 이씨를 이 왕족의 후손으로 공식 인정하고 이들이 베트남으로 귀화를 원할 경우 관련 절차를 간소화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매년 음력 3월 15일 하노이 인근 박닌성 천동사원에서 개최되는 ‘리 태조탄신일’ 축제에도 화산 이씨 문중을 정식 초청, 왕족 후손으로 예우하고 있다.

4월 화산 이씨 종친회 관계자들이 베트남 박닌성 천동사원에서 열린 리 태조탄신일 축제에 참석해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화산 이씨 종친회 제공

리 왕조로 이어진 양국의 우호는 이창근 현 베트남 관광대사를 통해 유지 발전하는 모습이다. 화산 리 씨의 26대손인 리 대사는 2010년 베트남 국적을 부여받은 뒤 2014년부터는 베트남 조국전선 중앙위원에도 임명된 상태다.

베트남 공산당 최대 전위조직인 조국전선은 청년·농민·여성 등 현지 사회단체를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구다. 베트남 정권이 화산 리씨를 단순한 양국의 얼굴 마담이 아니라 실제 중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화산 이씨 종친회 이훈 회장은 20일 한국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1992년 양국 수교 이후 베트남당 서열 5위 이상 지도자가 한국을 방문하면 반드시 화산 이씨 종친을 공식 접견할 것이라며 만난 베트남 지도자들은 모두 과거 (베트남전쟁 같은) 한국과의 악연보다 화산 이씨 등 오랜 인연에 집중해 양국 관계를 발전시키자고 힘주어 말했다고 밝혔다.

화산 리씨 베트남인 귀환 프로젝트 협력작업도

베트남 북부 바쿠닌 성 중심가에 위치한 리 왕조 태조를 기리는 거대 동상. 박닌=정재호 특파원

베트남의 남다른 리 왕조와 화산 이씨 사랑은 수도 하노이에 대한 현지인들의 자부심에서 비롯된다. 이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공원은 1010년 수도를 후와르 성(현 닌빈 성)에서 평성(현 홍강 삼각주 지역)으로 천도한 뒤 그곳을 탕롱(용이 승천한 곳)으로 명명했다. 이후 탕롱은 지금의 하노이로 이름이 바뀌어 10~12년째 베트남의 수도로 기능하고 있다.

리 왕조 역대 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천동사원의 역사해설가 르엉(48) 씨는 리 왕조는 216년간 집권해 현지에 유교를 처음 정착시키고 베트남의 중심을 지금의 수도 하노이로 개편했다며 베트남인들은 (프랑스 독립전쟁 등) 승리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하노이를 아끼는 만큼 리 왕조와 화산 리씨에 대한 애정도 깊다고 설명했다.

14일 베트남 바쿠닌 성 천동사원에서 역사해설가 루엉 씨가 화산 이씨의 시조 이영상 왕자의 아버지인 리 왕조 6대 왕 ‘영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닌=정재호 특파원

물론 베트남 정부의 화산 리씨 우대책 뒤에는 정치적 요소도 분명히 존재한다. 알다시피 베트남은 원칙적으로 종교나 조상숭배 등을 부정하는 사회주의 국가다. 그러나 베트남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달리 가톨릭 등 대부분의 종교활동을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심지어 베트남 공산당은 조상을 돌보는 풍습을 장려하기도 한다. 인민의 단결과 체제 이탈 방지에 혈연주의가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판단한 이유다.이런 관점에서 영화보다 더 극적인 ‘화산 이씨의 본국 귀환’은 베트남의 귀중한 ‘홍보전’ 재료다. 전쟁 등으로 고국을 외면한 약 500만명의 해외 거주 베트남인들이 하루빨리 본국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하는 베트남 정부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소재라는 얘기다.

이 회장은 이와 관련해 “우리 이야기는 해외 거주민들이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실제 사건”이라며 “현재 종친회는 베트남 외교부·문화체육관광부 등과 협의해 ‘베트남인 본국 귀환 프로젝트’를 함께 구상·추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수교 30주년 화산리 역사 적극 활용해야

지난해 11월 응웬 쑤앙후크 베트남 국가주석(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화산 리 씨 26대손인 이창근(왼쪽에서 세 번째) 베트남 관광대사 등 화산 리 씨 종친회 관계자들을 면담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화산 이씨 종친회 제공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 30주년을 맞은 올해 화산 리 씨의 행보는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이미 지난해 11월 응우옌 쑤앙후크 국가주석이 종친회 대표들과 면담을 가진 데 이어 리 왕조 사원이 위치한 바쿠닌 성 지도부도 4월 이들을 초청해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반면 한국 정부의 노력은 베트남 측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열린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막식 축하 영상을 통해 화산 이씨의 역사를 짧게 언급한 것을 제외하면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나 언급은 최근까지 전무한 실정이다.

화산 이씨의 후손으로 베트남에서 활동 중인 이시영 부강테크 베트남법인장은 리 왕조와 화산 이씨라는 과거의 희귀 접점은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 발전에 귀중한 연결고리로 계속 기능할 것이라며 한국의 생산기지인 베트남과의 관계를 끊지 않는다면 한국 정부도 우호적인 역사를 현실외교에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물을 마실 때는 항상 그 기원을 생각하라.” 한국만큼 조상을 극진히 섬기는 베트남 사람들은 이 말을 많이 쓴다. 명맥이 끊긴 이 왕족의 새로운 시작이 있는 한국 화산 이씨의 출발점이 남아 있는 베트남. 멀리 있는 것 같지만 두 나라는 이렇게 생각보다 가깝다.

1997년 화산 이씨 종친회가 베트남 리 왕조의 위패를 모신 박인성 소재 천동사원을 방문한 날 찍은 구름 사진. 사찰 관계자는 “8개로 갈라진 구름은 사찰에 모셔진 8명의 왕이 화산 이씨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이 사진은 덴도사찰 내부에 전시돼 있다. 박닌=정재호 특파원

하노이 박닌= 정재호 특파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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