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프로야구를 모두 씹어 먹어 버린 홈런타자 타이론 우즈, OB(현 두산)를 대표하는 슬러거 우즈, 타이론 우즈가 그립다

타이론 우즈가 69년생이어서 벌써 50대를 넘어섰다. 타이론 우즈는 한국을 재패하고 일본까지 잡아먹은 최고의 홈런타자였다. 그것도 한국에서 5년, 일본에서 6년을 최고의 타자로 군림했으니 대단한 타자는 타자였다.우즈는 한국에 오기 전 지난 10년간 마이너리그만 전전한 무명의 선수였다. 우즈는 마이너리그 시절 한방 능력만큼은 인정받았던 것 같다. 문제는 수비였다.주루와 타구 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수비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절반의 선수만으로는 빅리그를 밟을 수 없었다.

1998년 한국 프로 야구는 처음으로 외국인 선수의 공개 시험을 실시했다. 오랫동안 빅 리그로 불리지 않았던 우즈는 한국 무대를 노크하고 OB베어스에 입단한 우즈 인생에 전성기를 맞게 됐다. 입단 당시, 우즈는 OB의 심정수(심·존스), 김동주(김·동주)과 함께 공포의 클린 업 트리오를 형성했다. 우즈의 “오른쪽”, 김동주의 “히가시”, 심정수(심·존스)의 수를 잡고”오른쪽”,”트리오”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우즈가 한국에 오자마자 최고의 타자가 된 것은 아니다. 한국 투수의 구석을 찌르는 제구력에 따라잡지 못하고 고생했지만 믿음의 야구를 구사하던 김인식(김· 인 식)감독은 우즈를 강요하고, 결국 우즈가 한국 무대에 완전히 적응하도록 했다. 역시 국민 감독 김인식(김· 인 식)의 끈기가 우즈를 한국형 용병으로 변모시킨 것이다.01년 심정수(심·존스)가 현대에 가 침재 학(심·지에학)가 클린 업 트리오에 가세했다. 심정수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약해침재학과 함께 클린 업 트리오를 형성하며 우즈에 대한 의존도는 더 높아졌고 우즈는 이런 기대에 완벽하게 보였다. 우즈는 01년 한국 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한국 시리즈 MVP로 뽑히는 영예를 누렸다. 1998년 정규 시즌 MVP와 01년 올스타 게임 MVP에 이어한국 시리즈 MVP까지 우즈는 중요한 MVP는 모두 차지한 유일무이한 외국인 타자였다.02년 우즈는 홈런 25개로 부진에 빠졌다. 1998년부터 01년까지 우즈는 홈런 42-34-39-34개를 기록한 것으로 홈런 25개를 기록한 2022년은 매우 부진한 기록이었다. 이에 대해서 당시 언론은 묘한 보도가 잇따랐다. 첫째는 01년 한국 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우즈에 대한 구단의 대우가 소홀히 된 것에 대해서 우즈가 태업을 했다는 얘기다. 2번째는 외국인 선수가 너무 잘했기 때문에 심판진이 노골적으로 우즈를 배척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우즈 존으로 불릴 만큼 당시 심판진은 우즈가 타석에 들어서면 스트라이크 존이 갑자기 벌어졌다. 스트라이크 존이 넓어지면서 우즈가 정상적으로 타격을 받기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우즈는 03년 또 하나의 도전으로 일본을 선택. 02년 한국 야구에 실망한 적도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돈이었다. 03년과 04년 2년 요코하마 베이 스타스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 한국 야구를 바탕으로 동양 야구에 완전히 적응한 우즈는 요코하마에서 뛰는 2년간 매년 40홈런 이상을 기록, 일본 야구를 놀라게 했다. 05년 주니치는 우승 때문에 우즈를 택했다. 주니치에서 우즈는 4년간 38-47-35-35홈런을 기록했다. 특히 06년에는 홈런 1위, 타점 1위에 오르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무엇보다 주니치의 나고야 돔은 한국의 잠실 구장처럼 투수 친화적 구장에서 우즈가 홈런을 치는 불리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우즈의 힘은 나고야 돔을 훨씬 넘어 버린 것이다.타이론·우즈는 한국과 일본의 무대를 석권한 당대 최고의 강타자였다. 한국 프로 야구에서 우즈가 남긴 유산은 생각보다 크다. 지금은 외국인 타자에 대한 쓰임새가 다양하게 되었지만, 잠시 외국인 선수는 “홈런”을 양산하는 타자 아니면 대우를 받지 않았다. 외국인 드래프트 제도가 탄생하며 우즈가 남긴 홈런의 인상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엉성한 겉모습과 달리 웃는 모습이 귀여웠던 우즈가 오늘따라 만나고 싶다. 지금은 많이 늙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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